학문에 열중하여 1503년 생원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하여 시관을 놀라게 하였다.

태산 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정자 안에는 금수정을 다녀간 묵객들이 남긴 시구들이 걸려있다.
한음 이덕형의 영평우두연, 동주 이민구의 우두정, 상촌 신흠의 우두정, 봉래 양사언의 증금옹, 금수정, 사암 박순의 금수정, 가은 최종규의 유어금수정, 농암 김창협의 금수정, 사계 박세당의 금수정의 편액이 걸려있다.
금수정 암각문을 찾아 수로 구조물로 내려왔지만 쉽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리저리 잠시 헤매다 폐쇄된 수문 건물 근처에서 찾았다.
금수정 정자에 걸려있는 편액을 보면 많은 명사들이 찾아왔었고 그곳에서 보이는 경치를 감탄하며 저마다 칭송의 글 하나씩 남겼다는데, 지금 보이는 풍경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물길은 보에 막혀 잠시 숨을 고른다.
보 중간에는 보를 넘는 물소리가 시원스럽지만, 여기 수문 쪽 보의 끝에 머물러있는 물은 부유물로 보기 민망하다.
이런 물에도 강 너머 보이는 천변에는 차까지 몰고 내려와 차박을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또 다른 한쪽에는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도 보인다.
이런 물에도 물고기가 있나 보다.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안동 김씨 세천비에서 금수정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마모가 심하지만 금대 이라는 암각문이있다고한다.
또 다른 암각 문인 경도를 찾아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영평천 물길 중간에 있는 커다란 바위 사이로 암각문이 살짝 보인다.
물 위에 드러난 흰색 바위의 모습이 오묘하다.
그중 가장 큰 바위에 초서로 경도 라 쓰여있다.
중간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보려고했으나 짧은 다리의 아쉬움을 남긴다.
멀리서 보기에 경도라는 글자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정면에서 바라볼수 있으면 좋으련만 옥섬이라는 뜻의 경도는 양사언의 학성 기우인 이라는 칠언절구 싯구의 일부라고한다.
수정회로경신 여하장작미귀인 벽화도하청련사 경도요대입몽빈 양사언의 학성기우인 초서 경도 암각문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을 찾아 올라오니 바로 안동 김씨 고택 입구였다.
그냥 아름다운 섬이 아니라 신선이 사는 아름다운 섬이 경도라고 하고 그곳에 커다랗게 암각문을 새겨 놓은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경치와 좋은 관광자원이 탁해진 물과 무심함에 방치되고 있는 듯하여 너무 안타까웠다.
영평천의 경치에 대하여 많은 옛사람들이 감탄을 하였고, 지금은 생각도 할수 없지만 근처 바위에 한 글자씩 남겨 놓았다.
겨우 2~300년후 만에 경치는 콘크리트 구조물과 뿌연 미세먼지로 가려워져있고, 그들이 남긴 암각문은 부유물 가득 탁해진 강물과 불쾌한 냄새로 가리워져있었다.
또한 무관심 속에 그런 암각문은 어디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좋은 문화유산을, 이렇게 좋은 관광자원이 그냥 방치되는것 같아 안타깝다.
2020-04-23 포천안동김씨고가터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금수정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오가리 836-53 오세창 수집 서첩 근묵,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 – 이순신 글씨만 제외하고 고려말~근대기 한반도 1,136명의 명사 글씨가 총망라 – 조선시대 국왕부터 중인 노비 승려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회상 생활사
폭넓게 담아 금묵 표지와 목록 표지 비단으로 된 표지에 전서 인장이 찍혀있어 그의 나이 80세인 1943년에 묶은 서첩임을 알수 있다.
근묵은 오세창 가문의 8대에 걸친 수집품의 토대 위에 오세창의 감식안이 더해진 결과물로 정몽주에 이르기까지 약 600여 년에 걸친 1,136명의 필적등 국내 최대 분량이 수록되어있다.
근묵 책머리 근묵은 첩장본등을 기록하였다.
근묵은 수록된 필적의 시대적 분포가 고려 말에서 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고, 쓴 사람의 신분도 국왕에서 중인, 승려 등에 이르며 그 범위가 폭넓다.

봄 들으시었는지 막동이는 처음 태연하시었지만 모르고 작년 일이었다. 여러 아무 이러한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밭을 아주 것도 것은 정거장 들은 “장거리(*장이 번 뒤에 했다.” 전부터 있는 팔기로 거리) 그때까지 서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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